검색결과
-
(22) 정광수의 ‘창극조 대춘향가’(1954년 발간)본명은 정용훈(丁榕薰), 호는 양암(亮菴)이다. 해방 이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의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 판소리명창이다. 김창환, 유성준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으며, '수궁가'와 '흥보가'에 능했다.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이다. 1909년 9월 12일 전남 나주시 공산면 복용리 신동산마을에서 출생했다. 조선조 판소리 명창 정창업(丁昌業)의 손자. 1925년 16세에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현 광주시 광산구 내산동)에서 김창환 명창과 아들 김봉학에게 판소리 춘향가 흥보가를 배웠다. 1936년에는 진주에서 유성준에게 수궁가 적벽가를 배웠는데, 유성준의 적벽가는 삼고초려가 없는 민적벽가이므로 이 부분은 1940년에 이동백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또한 1940년 보성에서 정응민에게 심청가를 배웠다. 30대 이전에는 주로 학습과 독공을 하였고, 1943년부터 광복 때까지는 동일창극단에서 활동을 하였다. 1939년 6월 빅타 레코드에서 적벽가 새타령을 취입하였다. 1946년부터 1960대 초까지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광주예기권번, 광주국악원, 서동민속예술학원, 삼남국악원 등에서 소리선생을 역임했다. 1954년에는 광주에서 한덕수와 함께 창극조 대춘향가 사설집을 발간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정정렬 제 사설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소리선생으로서 교재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64년 처음으로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를 지정할 때, ‘지자군(持字軍) 대목(방자 편지 가져가는 데)’의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1974년 판소리 지정제도 개편 시에는 유성준 제 수궁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76년에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기록사업의 일환으로 수궁가(처음∼토끼 배 가르는데)를 녹음하였고, 1991년 뿌리깊은나무에서도 수궁가 완창(3LP)을 취입하였는데 이 녹음은 오선보로 채보되어 있다. 1986년에는 자신의 판소리 5바탕 사설을 정리한 전통문화오가사전집을 출판하였다. 정광수는 김창환의 서편제 계열의 소리로 입문하였고, 나중에 유성준의 동편제 계열의 소리를 학습하였기 때문에 그의 소리는 동·서편제의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다. 긴장감 있는 성음을 구사하면서도 부침새가 정교하고 화려하여 어려운 소리라는 평을 받았으며, 또한 기품 있는 너름새를 구사하여 ‘조선조 광대의 너름새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유성준 제 수궁가 전승에 크게 기여하여 김영자·안숙선·정의진·정옥향 등 여러 이수자를 배출하였다. 2003년 11월 2일 향년 94세로 작고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문화훈장), 1995년 동리대상, 2000년 제7회 방일영국악상(方一榮國樂賞)을 수상했다.
-
동편제·서편제 아우른 '선비 명창'정광수 명인은 본명은 정용훈(丁榕薰)이고, 호는 양암(亮菴)이다. 해방 이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의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 판소리명창. 김창환, 유성준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으며, 수궁가와 흥보가에 능했다.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이다.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국창(國唱)으로 불렸던 조선조 말 명창 정창업의 손자로 15세에 명창 김창환 문하에 들어가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유성준에게 수궁가와 적벽가를, 정응민에게 심청가를, 이동백에게 적벽가를 각각 배웠다. 창극 운동에도 참여하다가 광복 이후 광주에서 삼남국악원을 설립해 제자를 양성해 왔고 1964년 인간문화재가 됐다. 판소리보존연구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지난해에도 국립국악원에서 공연을 갖는 등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해 왔다. 1909년 9월 12일 전남 나주시 공산면 복용리 신동산마을에서 출생. 본명 용훈(榕薰), 호 양암(亮菴). 조선조 판소리 명창 정창업(丁昌業)의 손자. 1925년 16세에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현 광주시 광산구 내산동)에서 김창환 명창과 아들 김봉학에게 판소리 「춘향가」·「흥보가」를 배웠다. 1936년에는 진주에서 유성준에게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웠는데, 유성준의 「적벽가」는 삼고초려가 없는 「민적벽가」이므로 이 부분은 1940년에 이동백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또한 1940년 보성에서 정응민에게 「심청가」를 배웠다. 30대 이전에는 주로 학습과 독공을 하였고, 1943년부터 광복 때까지는 동일창극단에서 활동을 하였다. 1939년 6월 빅타 레코드에서 「적벽가」 ‘새타령’을 취입하였다. 1946년부터 1960대 초까지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광주예기권번, 광주국악원, 서동민속예술학원, 삼남국악원 등에서 소리선생을 역임했다. 1954년에는 광주에서 한덕수와 함께 『창극조 대춘향가』사설집을 발간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정정렬 제 사설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소리선생으로서 교재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64년 처음으로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를 지정할 때, ‘지자군(持字軍) 대목(방자 편지 가져가는 데)’의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1974년 판소리 지정제도 개편 시에는 유성준 제 「수궁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76년에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기록사업의 일환으로 「수궁가」(처음∼토끼 배 가르는데)를 녹음하였고, 1991년 뿌리깊은나무에서도 「수궁가」 완창(3LP)을 취입하였는데 이 녹음은 오선보로 채보되어 있다. 1986년에는 자신의 판소리 5바탕 사설을 정리한 『전통문화오가사전집』을 출판하였다. 판소리 양대 산맥인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예인(藝人)이었다. 많은 국악인들은 우리 소리의 예스런 본디 모습(고제·古制)을 온전히 간직했던 큰 소리꾼이 갔다고 입을 모은다. "한학에도 밝아 ‘선비 명창’으로 통한 정 명창이 무대에 나서면 태(態)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소리라도 엥겨 멋진 발림(손짓 몸짓)을 할라치면 그런 가경(佳景)이 없는데 이를 영 만나볼 수 없게 됐다”고 이보형씨(문화재전문위원)는 애도했다. 정 명창은 일제 때 대동가극단·동일창극단 창극무대를 누비다 광복 후 광주에서 광주국악원을 창설,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1964년 판소리 ‘춘향가’로 우리나라 최초 무형문화재의 한 사람이 됐고, 1974년 중요무형문화재 ‘수궁가’ 보유자가 됐다. 82세 때 ‘수궁가’ 음반을 냈고 아흔을 넘긴 고령에도 국악로보존회 무대 등을 지키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지난달 29일에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최로 서울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악화로 딸 의진씨가 대신 무대에 섰다. 정 명창은 판소리 사설집을 정리한 ‘전통문화 오가사집’ 등 저서를 남겼다. 1983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문화훈장), 2000년 제7회 방일영국악상(方一榮國樂賞)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 문화훈장)과 KBS 국악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전통문화 오가사전집’이 있다. 유족으로 아들 은석씨 등 1남2녀가 있다. 정광수는 김창환의 서편제 계열의 소리로 입문하였고, 나중에 유성준의 동편제 계열의 소리를 학습하였기 때문에 그의 소리는 동·서편제의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다. 긴장감 있는 성음을 구사하면서도 부침새가 정교하고 화려하여 어려운 소리라는 평을 받았으며, 또한 기품 있는 너름새를 구사하여 ‘조선조 광대의 너름새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유성준 제 「수궁가」 전승에 크게 기여하여 김영자·안숙선·정의진·정옥향 등 여러 이수자를 배출하였다. 2003년 11월 2일 향년 94세로 작고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문화훈장), 1995년 동리대상, 2000년 제7회 방일영국악상(方一榮國樂賞)을 수상했다.
-
묵계월 명창에 방일영국악상경기명창 묵계월(墨桂月·83) 선생이 방일영문화재단(이사장 윤주영)이 주관하는 제11회 방일영 국악상 수상자로 선정됐다.1921년 서울 출생인 묵 명창은 1975년 안비취, 이은주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보유자로 지정돼 이 분야 일인자로 활약해왔다. 시상식은 19일 오후 4시 조선일보사 정동별관 7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
'제8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로 정경태씨 선정방일영문화재단(이사장 윤주영)은 '제8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로 정경태(鄭坰兌.84.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예능보유자) 씨를 선정했다다.방일영 국악상 심사위원회는 "정씨가 시조 가사 가곡 등 정가(正歌)의 모든 분야에 정통한 이 시대의 보기드문 가객으로 시조보를 비롯해 가사보, 가곡보 등 각종국악보를 정리, 간행해 국악이론 체계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선정이유를 말했다.1994년 제정된 방일영 국악상은 해마다 국악발전에 공로가 큰 원로를 선정, 시상하며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3천만원의 상금이 수여된다.시상식은 16일 오후 5시 조선일보사 정동별관 7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
제9회 방일영국악상에 이은관씨방일영문화재단(이사장 윤주영)은 '제9회 방일영 국악상' 수상자로 이은관(李殷官.85.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보유자)씨를 선정했다.방일영 국악상 심사위원회는 "이씨가 평생을 국악 대중화와 배뱅이굿 등 서도소리 발전에 바친 공로가 높이 평가됐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1994년 제정된 방일영 국악상은 해마다 국악발전에 공로가 큰 원로를 선정, 시상하며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3천만원의 상금을 수여한다.시상식은 다음달 22일 오후 5시 조선일보사 정동별관 7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
방일영국악상 신영희 명창방일영문화재단(이사장 조연흥)이 수여하는 '방일영국악상' 제26회 수상자로 소리꾼 신영희(77·사진·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씨가 선정됐다. 전남 진도 출신인 신씨는 1953년 열한 살에 부친 신치선 명창에게서 판소리를 배운 이래 60년 넘게 소리꾼으로 활동해왔다. 특히 1988년 KBS 개그 프로그램 '쓰리랑 부부'에 출연해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국악의 대중화'를 앞장서 이끌었다. 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회는 "신영희 명창은 독창(獨唱) 위주이던 판소리를 마당극과 방송 프로그램 등 다양한 스타일로 변주해 '나이 든 사람들이나 즐기는 고루한 전통'이란 편견을 깨뜨린 판소리계 대모"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1994년 제정된 방일영국악상은 평생 국악 발전에 기여해온 공로를 바탕으로 하되 현재에도 활발하게 공연 활동을 펼치는 국악인에게 수여된다. 수상자는 상패와 상금 7000만원을 받는다. 시상식은 11월 21일 오후 5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
29회 방일영국악상에 김일구 명창김일구 명창(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이 제28회 방일영국악상을 수상했다.김 명창은 판소리뿐 아니라 아쟁·가야금 산조에 두루 능한 소리를 듣는 국악계의 명인으로 1987년 ‘적벽가’ 첫 완창 발표회를 연 뒤 미국·영국·프랑스 등에서 판소리 완창 무대를 열었다.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회는 "김일구 명창은 각 분야에 두루 능한 예인으로 국악 계승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방일영국악상은 1994년부터 평생 국악 발전에 기여하고 현재까지 활발하게 공연을 펼치는 국악인에게 수여한다.
-
2022년 국악계 10대 뉴스 1차 선정, 29題2022년 국악계의 이슈, 성과, 변화상을 볼 수 있는 국악신문 선정 ‘국악계 10대 뉴스’ 1차 26제가 선정되었다. 2차 선정위와 원로자문단의 최종 심의를 거쳐 ‘10대 뉴스’ 선정, 29일 발표한다. 21일까지 각 기관 단체 홍보팀을 통해 40여제를 응모 받아 22일 1차 선정에서 24제를 아래와 같이 선정했다. 제1차 28제 선정 뉴스(응모 順) 1 조선일보, 조순자 가곡 가사 보유자 방일영국악상 수상 2 국공립 국악단체 수장 임명(선정) 난맥상ㅡ국립극장장(미정), 국립국악원장(낭설), 국악 방송(비전공자 임명 논란), (사)국악협회장(교체 미완) 3 국립국악원, 송년 공연 성공 이룬 ‘임인진연’ 4 안숙선 가야금병창에서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재지정 5 2013년 시작된 아리랑 주제 ‘서울아리랑페스티벌’ 행사 폐기 및 총감독 별세 6 문화계 별 이어령, 김지하 선생 별세 7 정선군과 40개 지역 아리랑 전승단체 참여, 아리랑 등재 10주년 기념,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비 건립 8 문화재청, 국가 종목지정 전승공동체 맞춤형 지원 제도화 발표(아리랑, 제다, 씨름, 해녀, 김치담그기, 제염, 온돌문화, 장 담그기, 전통어로방식-어살, 활쏘기, 인삼재배와 약용문 화, 막걸리 빚기, 떡 만들기, 갯벌어로) 9 국립극장, 해외 초청 공연 호평 받은 ‘트로이의 연인’ 10 유튜브 아리랑 3600곡 탑재 ‘정창관의 아리랑’ 기념공연 11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 12 문화재청, 문화유산 가치보존을 위한 한국 원칙’ 선포 13 전국노래자랑 진행자 송해, 재담꾼 김법국(김뻑국)(1937년생/김진환)선생, ‘선소리산타령’ 최창남 (1935년생), 황용주(1937년생) 예능보유자 별세 14 문화재청, 2022년 대한민국 탈춤-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15 국립무형유산원, ‘명인 오마주-이은주, 김석출, 박봉술 편’ 공연, 16 문화재청, 창덕궁 후원에서 만나는 궁중 음악과 춤, ‘창덕궁 풍류’ 공연 17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문화도시' 지정(서울을 제외한 광역시권(인천, 대전, 부산, 대구, 광주), 경기권, 충청권, 강원권, 경상권, 전라권, 제주권 등 7개권역으로 구분-문화를 통한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 문화를 통한 지역사회 문제 해결, 지역주민 문화 향유 확대, 지역 문화 기반 조성 및 역량 강화 등을 달성 목표) 18 국립무형유산원, 인간문화재 10인‘, 전통예능의 품격’ 공연 19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밀양 분원’ 건립 확정 20 문화재청, 60년 만에 정책방향 대전환, ‘문화재’에서 ‘유산(Heritage)’ 개념 사용 21 문화재청, 600년전 세종대왕 ‘관현맹인(管絃盲人)’제도 재현 공연(관현맹인전통예술단), 경복궁 집경당 22 문화재청, 문화유산 가치보존을 위한 ‘한국원칙’ 선포(국제 사례 호주 ‘버라 헌장(Burra Charter)’, 영국 ‘역사적 환경의 지속가능한 관리를 위한 보존 원칙, 정책과 지침’, 캐나다‘캐나다의 역사적 장소 보존을 위한 표준과 지침’, 중국 ‘중국 문물고적 보호준칙’) 23 공연문화예술 6개 관계기관(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국립국악원, 국립극단, 국립아시 아문화전당, 국립중앙극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공연문화예술자료 수집․보존과 공동서 비스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 체결 24 문화체육관광부, ‘공연전통예술분야 경연대회 장관상장 지원기준 발표’(예비평가 최소 3년 이상 지속한 전국 규모 대회로, 상장심사위원회의 심사를 통해 선정함) 25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60년 ‘한국민속예술제’ 기록의 산물, 민속예술 디지털 아카이브 ‘민속곳간’ 공개 26 국립무형유산원, ‘2022 대한민국 무형유산대전’-자연과 사람을 잇는 무형유산 13개 공연. 27 국립무형유산원, ‘이수자뎐’-무형문화재 이수자 이예랑, 박천경, 백진희, 공민선, 원진주 정수인, 김재민, 방지원, 성슬기 28 국악방송, 송년특집-22년 대통령상 수상자를 만나다 29 문체부, 예산이 2022년도 7조3968억에서 2023년 6조7408억원으로 9% 가까이 감소
-
국악인 이은관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배뱅이굿의 대가 이은관(97)옹이 12일 오전 9시20분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917년 강원도 이천에서 태어난 이옹은 16세 때 황덕렬에게 서도소리를 배웠다. 19세에는 황해도 황주권번 소리선생 이인수에게 배뱅이굿을 사사했다. 광복 후 대한국악원 민요부에서 활동했다. 이후 장소팔(1922~2002), 고춘자(1922~1994)와 함께 유랑 극단을 꾸려 서민들과 함께했다. 1960년대 '태평가' '아리랑' '노래가락' 등의 경기민요를 취입하고 라디오, 영화, TV 등에서 활약했다. 1968년 한국국악협회 감사, 1975년 한국국악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민속예술학원을 설립, 제자 양성에 힘을 쏟기도 했다. 198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중 배뱅이굿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1990년 보관문화훈장, 2002년 제9회 방일영국악상을 받았다. 지난 2월 건강한 모습으로 SBS TV 예능프로그램 '스타킹'에 출연하기도 했다. 4녀1남을 남겼다. 한양대병원 장례식장 10호실, 발인 14일 오전, 장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02-2290-9442
-
[社說] 사설 오복녀 명창 소리, ‘소스라쳐 절감’하자우리 국악계는 아름다운 전통을 갖고 있다. 바로 ‘추모(追慕) 공연’을 한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덕과 공로를 그리워하여 정성으로 올리는 제의(祭儀)의 일종이다. 올해의 이 추모 공연은 ‘서도소리’·‘대동강 물 맛본 소리’라는 키워드로 상징되는 오복녀 선생 추모공연을 두 제자 김광숙과 유지숙이 마련한 행사다. ‘滿堂 吳福女 선생 20주기 추모 공연-서천에서 불어온 만당의 바람...’이다. 이미 본보가 보도한 대로 11월 7일 서울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에서 개최하는데, 두 제자의 슬픔을 넘은 공경의 제의이다. 이런 추모 공연은 고인이 된 예인을 회상(回想 recall)하여 행하는 행사이다. 회상은 기억된 것을 다시 떠올려 생각해 내는 일, 심리학은 이를 ‘뇌 속에 저장된 정보의 재생’이라고 한다. 오복녀라는 기억, 이를 기억하게 하는 그 단서는 무엇일까? 바로 이 단서를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은 이미 1999년 제6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 오복녀에 대한 축사에서 제시한 바 있다. 한 좌장은 이제 통일이 되어 고향을 가도 옛 듣던 가락, 옛 놀던 연희들을 만나기란 거의 난망이고, 그래서 안타깝고 허망하다고 한탄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서 명창의 이력을 간결하게 내세웠다. 서도지방에서 태어나 서도의 정서와 풍물을 온전히 체득한 가객으로, 노래 속에는 자연히 서도 예술의 맛과 멋이 진솔하게 배어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예찬하였다. 수심가나 긴아리에 묻어나는 애잔한 정한이 그러하고, 난봉가나 산염불에 스며 있는 따듯한 삶의 체취가 그러하며, 초한가나 공명가 등을 통해서 펼쳐내는 담담한 인생 경륜이나 고담들이 그러하니, 한마디로 노래 속에 서도적인 삶이 있고 서도적인 인생살이가 내밀하게 농축돼 있다고 하였다.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에게는 위안이요 추억이라고 하며 문화적인 정체성과 동질성을 확인시켜 주는 고맙고도 절실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거듭 내세웠다. 그래서 오 명창이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서도소리의 명맥을 실낱같이 이어가며 힘겹게 달려가는 성화 봉송자와도 같다고 칭송했다. 그리고 이렇게 맺었다. 바로 회상의 단서를 제시해 주었다. "오 명창의 서도소리는 음악의 차원을 뛰어넘는 시대적 의미망을 지닌다. 이런 상황을 떠올릴 때 우리는 재삼 오복녀 명창의 존재 의미와 그 음악의 존귀함을 깊이 통찰하고 소스라쳐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22년 전 생전의 축사가 영서(永逝) 20년을 지난 오늘, 국악계 큰 어른이 ‘소스라쳐 절감’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오복녀 명창을 회상하게 하는 단서이지 않겠는가. 1913년 12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16세 무렵 장금화 선생으로부터 서도소리를 시작하여, 하규일 선생에게 배반(盃盤)치레를 하고 가인으로 활동하였다. 2001년 1월 타계할 때까지 70 성상을 서도소리 원형 보존과 전파에 기여하였다. 이 가을의 마지막을 서도소리로 빛나는, 그리고 두 제자를 계승자로 남긴 한 예인을 회상하는 기회를 갖는 것도 뜻깊을 듯하다. 혹시라도 소스라쳐 절감하여 영감을 얻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
한악계 별들 40: 한악계의 은인, 조선일보 방일영국악상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세상에는 상도 참 많다. 갖가지 상들이 넘쳐나고 있다. 상들이 지천이다 보니 개중에는 뒷말이 개운찮은 상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 많은 상 중에서 과연 좋은 상이란 어떤 것일까.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겠지만, 내가 보는 좋은 상이란 우선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상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상금의 과다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주최측의 명성이나 위엄에서 오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상의 권위는 공평무사한 운영에서 온다. 아름아름 주고받는 상에는 권위가 쌓일 리 없다. 주는 자와 받는 자 공히 그저 주기적으로 치르는 요식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주는 자도 받는 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받는 자도 수상에 대한 자긍심을 갖기 어렵다. 시를 쓰는 어느 지인의 말이다. 자기가 아는 문인이 얼마 전 어느 문학상을 받았단다. 그런데 상을 받은 대가로 주최측이 발간하는 정기 간행물을 상금 이상으로 팔아줘야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이 문학계에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수상자가 얼마를 내겠다고 먼저 언질을 주고 상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시상제도가 하나의 생계수단으로 전락한 셈이다. 상 받았다는 것을 시큰둥하게 보거나 우습게 알기 십상이다. 이 같은 폐단은 전통음악계에서도 간간이 들려온다.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면 은연중에, 어떤 때는 아예 드러나게 자기 제자나 지인이 수상자가 될 수 있도록 서슴지 않고 부끄러운 짓들을 한다. 꽤 오래전 일이다. 전남 고흥에서 김연수 명창을 기리는 제1회 김연수국악상 심사를 위촉받고 참여한 적이 있다. 김 명창의 수제자를 자임하고 남들도 그렇게 인정하는 오 아무개 명창이 심사위원장 역할을 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국악 전공자도 아닌 인물을 수상자로 극구 추천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인데 전주에서 국악계를 위해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수상 조건에도 맞지 않는 사람이라며 나부터 적극 반대했다. 결국 안숙선 명창을 제1회 수상자로 선정했다. 선정 회의가 끝난 후 은밀히 알아보니 오 명창이 열렬히 추천했던 인물은 바로 자기 남편이었다. 이 같은 전통음악계의 시상 풍토를 일거에 쇄신하고 등장한 시상제도가 다름이 아닌 방일영국악상이다. 하기사 방일영국악상은 기존의 여느 국악상들과 같은 지평에서 운위할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만큼 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이 상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일보를 한국 대표 신문으로 키워 낸 우초愚礎 방일영方一榮 선생이 1994년에 제정한 국악상이다. 기억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1994년은 소위 ‘국악의 해’라고 해서 정부가 한 해 동안 국악계를 집중적으로 지원한다는 취지로 출범한 해다. 이어령 문화부장관 시절 그분의 아이디어로 한 해에 예술계 어느 한 분야를 당시 10억 원씩 특별 지원한다는 정책을 실행했는데, 무용과 문학에 이어 세 번째로 국악의 해가 선포된 것이다. 아무튼 유달리 국악을 좋아하며 국악인들을 자별히 배려해 주셨던 우초 선생은 국악의 해를 맞이하여 명실상부한 상다운 상을 출범시켰다. 지난해로 4반세기를 맞이한 방일영국악상은 그동안 전통음악계에 적지 않은 자극과 활력을 불어넣어 왔다. 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이라면 누구나 내심 수상을 소망하는 선망의 대상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방일영국악상의 권위와 위상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간의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누구나 그 상의 존재가치를 십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 제1회 때의 수상자부터 순차적으로 열거해 본다. 제1회 판소리 명창 김소희, 제2회 국악학자 이혜구, 제3회 판소리 명창 박동진, 제4회 정재무 김천흥, 제5회 종묘제례악 성경린, 제6회 서도소리 오복녀, 제7회 판소리 명창 정광수, 제8회 정가 정경태, 제9회 배뱅이굿 이은관, 제10회 가야고 황병기, 제11회 경기민요 묵계월, 제12회 대금 산조 이생강, 제13회 경기민요 이은주, 제14회 판소리 오정숙, 제15회 판소리 고법의 정철호, 제16회 민속음악학 이보형, 제17회 판소리 박송이, 제18회 피리 정재국, 제19회 판소리 성우향, 제20회 판소리 안숙선, 제21회 경기민요 이춘희, 제22회 거문고 김영재, 제23회 사물놀이 김덕수, 제24회 가야고 이재숙, 제25회 한국음악학 송방송. 이쯤 되고 보면 방일영국악상은 상이되 상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를 증언하는 한국문예사의 거대한 물줄기이자 척추 같은 산맥이다. 따라서 그 상은 곧 음악상이되 하나의 독특한 문화현상이자 역사의 실록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영예로운 국악상에 나는 직간접적으로 꽤 자주 연계돼 온 셈이다. 직접적으로는 심사위원이나 심사위원장을 했고, 간접적으로는 수상자들이 부탁한 축사의 글들을 시상식 유인물에 기고해 왔다. 총 25회에 걸친 시상 중에서 16회에 걸쳐서 나의 심사평이나 축하의 글이 실렸으니 이 상과의 인연도 적지 않은 연륜이 쌓였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국악신문 독자들에게 귀한 글을 보내주신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이지출판사에게도 감사드립니다.)
-
한악계 별들 36: 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작곡가, 황병기 교수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한국 전통음악계에 문화사적인 자긍심을 심어 온 방일영국악상이 올해로 열 돌을 맞았다. 유구한 민족음악사의 맥락에서 볼 때 10년의 시간이란 하나의 작은 눈금에 불과하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한국 음악계의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그 작은 시상 경력 10년의 눈금은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우리는 이내 간파할 수 있다. 그것은 외래문물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묵시적으로 일깨워 온 하나의 시대적 계도啓導였고, 국제화의 조류 속에서 민족예술이 지향해야 할 원대한 좌표와 체질을 확고하게 제시하는 역사적 선언의 뜻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언간 20세기 문화적 격랑의 시대도 갔다. 주객전도의 부끄러운 문화 구도도 눈에 띄게 바로잡혀 가고, 법고法古 없이는 창신創新도 어렵다는 자각에서 주체적 문화의식도 점점 높아가고 있다. 명실상부한 문화적 과도기를 넘어서고 있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한국 문화사의 한 굵은 마디竹節를 형성해 가는 시점이라고 하겠다. 이 같은 시대적 변이의 마디에 상응하여 방일영국악상 10년의 마디에서도 작은 변화를 꾀해 보았다. 일부 심사위원들을 교체하여 새로운 감각과 가치관을 보안했고, 수상 대상도 연령층을 낮추고 현재 활동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신을 모색해 본 게 그것이다. 이러한 일신된 체제로 제10회 방일영국악상 심사회의가 열렸다. 이보형, 정재국, 황준연, 안숙선, 박범훈, 한명희 6명의 심사위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는 먼저 방일영국악상의 발전적 운영을 위한 자유 토론이 있었고, 이어서 제10회 수상자로 황병기 교수를 선정했다. 황병기 교수가 만장일치로 선정된 이유는 그분의 공적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가야고 연주가로 국내에서는 국악의 위상을, 해외에서는 한국의 국위를 선양했고, 불모의 창작계에 현대적 감각을 접목한 주옥같은 신작을 만들어 냄으로써 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공로 등은 비단 국악계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인정하는 황 교수의 공적이 아닐 수 없다. 황 교수는 본디 법학도였다. 한때 엘리트 코스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던 경기고에 서울법대를 나왔다. 하지만 그는 학창 시절부터 국립국악원에 드나들며 가야고를 배웠다. 그 덕에 당시 60년대 초부터 서울음대 국악과 강사로 출강했다. 이처럼 취미로 시작한 가야고가 대학 교단으로 연계가 되었고, 끝내는 법조인이 아닌 음악인으로 업을 삼으며 평생을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연주자로 출발한 황 교수는 또 한 번의 변신을 한다. 이번에는 작곡가로의 새로운 지평에 들어선다. 물론 그가 작곡 활동을 시작한 60년대 초반 이전에도 국악 작곡 활동은 있었다. 특히 40, 50년대에는 당시 국립국악원에 봉직하고 있던 김기수 선생이 거의 독보적인 활동으로 종래 정악풍의 신작을 발표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음대에 국악과가 창설되면서 전통음악 작곡계도 환골탈태되기 시작하는데, 다름 아닌 서양 음악의 작곡어법을 매체로 한 창작곡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황 교수의 작곡 활동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는데, 특히 그는 당시 서양 현대 음악기법으로 작곡 활동을 활발히 하던 서양 음악 전공의 강석희, 백병동 등과 교유하며 서구적인 작곡기법으로 가야고 음악의 신곡들을 창작해 내기 시작했다. 이런 경위로 시작한 황 교수의 작곡 활동은 ‘비단길’, ‘미궁’, ‘가라도’ 같은 자기류의 신곡을 만들어 내며 가야고 음악의 레퍼토리를 획기적으로 확충해 갔다. 결국 황병기 교수의 일생은 법학도로 출발하여 가야고 연주가로, 가야고 작곡가로 변모해 가며 다채로운 삶을 살아간 셈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한악계의 별들" (양장)이 책은 가곡 [비목]의 작시자로 널리 알려진 한명희 선생이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보석 같은 인연들의 이야기를 역사라는 시간의 대리석에 새겨놓은 것이다.작가가 유려한 문체로 새겨놓은 주인공들은 우리 한악(국악)계의 터를 다듬고 보듬어 온 명인 명창들과 한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분들이다.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된 아리랑과 한국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흥, 멋, 운치)에 대한 해박한 고찰은 한국의 전통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길라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나와 TBC(동양방송) PD 시절부터 국악에 남다른 애정과 사명감을 갖고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우리 국악계를 이끌어 온 분들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어 온 저자 또한 우리 음악을 계승 발전시켜 온 산증인이다.대학교수와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내면서 『하늘의 소리 민중의 소리』 『우리가락 우리문화』 『한국음악, 한국인의 마음』 『하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학 떠난 빈터에는』 등의 저서는 우리 음악계의 소중한 문헌들이다.004서문인연 한 자락1부010가야고 병창으로 그린 비천상 _ 강정숙 명창012사물놀이로 세계를 제패한 선구자 _ 김덕수 명인016반듯한 기개 꼿꼿한 자존심 _ 김소희 명창022회심곡의 프리마돈나 _ 김영임 명창026월하의 음악 세계가 그립다 _ 김월하 가객028천진무구한 가섭의 염화미소 _ 김천흥 선생034둥둥 북을 울리면 신명이 솟는다 _ 김청만 명인036경기민요의 외연을 넓혀 가는 열정 _ 김혜란 명창038경기민요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주인공 _ 묵계월 명창041국악교육에 헌신한 선견지명 _ 박귀희 명창044끈기와 집념의 화신 _ 박동진 명창048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내는 능력과 수완 _ 박범훈 교수053늦가을 햇살녘의 잔상 _ 박병천 명인, 김영태 시인059청초한 유덕遺德은 한악계의 등불 _ 성경린 선생061학문의 바탕 체상體常을 튼실히 한 학자 _ 송방송 교수063소리꾼의 판소리 사설 정립 _ 송순섭 명창065장인 정신의 사표가 될 판소리 여왕 _ 안숙선 명창076서도지방의 맛과 멋을 이어 준 고마운 은인 _ 오복녀 명창078동초제 판소리 정립에 기여한 공적 _ 오정숙 명창081소쇄원 광풍각의 죽림풍류 _ 원장현 명인085실사구시의 학문을 궁행한 성실한 학자 _ 이보형 선생088고소한 해학이 일품인 경중예인鏡中藝人 _ 이상규 교수090대금산조의 달인 _ 이생강 달인093노래로 그려 낸 한 시대의 풍속사 _ 이은주 명창096가야고 음악의 경중미인 _ 이재숙 교수099소중한 문화지킴이 한국정가단 _ 이준아 가객101노래와 인품이 교직된 경기민요의 대가 _ 이춘희 명창103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음악학의 태두 _ 이혜구 박사107심금을 퉁겨서 노래하는 국민가객 _ 장사익 가걸歌傑110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소리꾼 _ 정광수 명창113피리로 세상을 보듬어 온 외곬 인생 _ 정재국 명인116영년퇴은이 유발하는 무정세월 _ 조운조 교수119놀이마당문화의 파수꾼 _ 지운하 명인122한국전통음악연구회의 창단 _ 최경만 명인125정악 가야고의 법통을 잇는 금객琴客 _ 최충웅 명인130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작곡가 _ 황병기 교수133내 삶의 인드라망을 수놓은 한악계 별들 _ 김연수, 이창배 외2부144전통음악을 사랑하는 고마운 기업인 _ 초해 윤영달 선생148초야에 묻힌 국악계의 보옥 _ 서암 권승관 선생153어느 인연이 그린 삶의 무늬 _ 백석의 연인 자야 여사158기인처럼 살다 간 풍류객 _ 연정 임윤수 선생161정녕 가시나이까 _ 화정 김병관 선생165유어예의 귀명창 _ 호암 이병철 선생175한악계의 은인 _ 조선일보 방일영국악상179문화가 된 노래 아리랑185한국
-
한악계 별들 21: 동초제 판소리 정립에 기여한 공적 오정숙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가을은 오곡의 결실만이 아니라 문화예술의 열매를 수확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만큼 요즘 우리 주변에는 찬연한 문화예술 활동이 즐비하고,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이 물결을 이룬다. 양적인 수치로만 치면 우리 삶은 한층 가며롭고 윤택해야 마땅할 터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추수가 끝난 들판처럼 공허하기 일쑤다. 결실의 나락에도 쭉정이가 있듯이 문화예술계에도 아마 무지갯빛 거품이 충일해 있기 때문일 게다. 사람人이 재주를 앞세워 억지로 하는 행위爲는 필경 가짜[人+爲+僞]의 거품에 빠지기 십상이다. 발효되고 체화된 제 얘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언巧言이나 영색令色치고 진짜배기가 드물다는 말이 그래서 작금에도 유효한지 모를 일이다. 제14회 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들은 우선 예술계에 가득한 거품을 걷어내고 튼실한 알곡을 찾아보려 애썼다. 특히 재승박덕형의 표피적인 화려함보다 진정한 장인 정신을 지향하는 예인藝人을 거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 같은 안목의 조망경에 들어선 몇몇 후보들을 대상으로 설왕설래의 숙고 끝에 흔쾌히 결정된 수상자가 곧 오정숙吳貞淑 판소리 명창이다. 각고의 노력 없이 명창의 반열에 설 수 없음은 많이 들어온 상식이다. 오 명창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열네 살 때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 명창의 문하에 들어간 이후 오직 한 우물을 파는 데만 정진했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배어 있다. 하나는 자기 소신의 고집과 앙기로 남다른 장인 정신이 두드러졌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동초제 판소리의 맥을 이으며 이를 확실하게 정착시켰다는 판소리계의 공적이다. 여기 동초제 판소리란 김연수 명창이 정리한 판소리의 한 판형을 의미한다. 새로운 소리제의 계발이라기보다는 기존 여러 명창들의 좋은 더늠의 대목들을 취사선택하여 모범답안 같은 판소리 한바탕의 정형定型을 이뤄 놓은 것이 ‘동초제東超制’다. 굳이 비유하자면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가 중구난방의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해서 정리했다면, 동초 김연수는 명창들마다 형형색색이던 소리제를 일정한 틀 속으로 형식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초제 판소리는 판소리 특유의 즉흥성은 크게 제약되지만, 익히기나 전승하기에는 많는 장점이 있다. 아무튼 오정숙 명창은 이 같은 동초제 판소리의 정통正統을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이를 한층 갈고 닦으며 널리 정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오 명창은 1972년, 8시간에 걸친 동초제 춘향가의 완창을 시작으로 매년 한바탕씩, 현존 다섯 마당의 판소리를 모두 완창하여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50, 60년대만 해도 판소리 완창은 거의 들어보기 힘들었다. 모두 토막 소리공연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박동진 명창에 이어서 여류로는 처음으로 오 명창이 판소리 완창의 관심과 진미를 선구적으로 일깨웠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서도 우리는 오 명창의 소리에 대한 남다른 집념과 끈질긴 프로 기질을 읽을 수 있다. 스승 동초 선생을 닮아서인지 오정숙 명창은 제자들을 엄격하게 교육시키기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그의 문하에는 소리 한번 다잡아 해보겠다는 제자들이 유난히 많이 모여든다. 제자를 일단 받으면 우선 사람이 되고 소리꾼이 될 수 있도록 인정사정없이 몰아간다. 그래서 일단 그의 엄격한 훈도를 거치고 나면, 적어도 될성부른 떡잎 정도는 되기 마련이다. 재주를 조금 인정받으면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착각하는 위인들도 많다. 그 같은 경우는 재주가 아까울 정도로 진정한 경지에 들지도 못한 채 중도폐기되기 일쑤다. 그래서 참다운 예술의 밑바탕에는 수기修己와 인격人格이라는 사람의 문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아도 오늘의 수상자인 오정숙 명창은 바른 소리예술의 길과, 바른 사람의 길을 걸어왔음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동초 김연수 명창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스승을 그토록 극진히 모시고 흠모해 오던 제자가, 그분의 탄신 백 주년에 동초제 판소리 정립의 공로로 상을 받게 되니 분명 수상의 의미가 배가되는 느낌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
한악계 별들 19: 학문의 바탕 체상體常을 튼실히 한 학자, 송방송 교수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공적을 평가하기는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당사자의 학문적 성취도는 물론 개인적 품성까지도 소상히 알고들 있기 때문이다. 제25회 방일영국악상의 심사도 마찬가지였다. 국악 전공자들이 모여 국악계의 수상자를 선정하는 일이었으니 첨예한 논란이 있을 수 없었다. 거론되는 대상자들에 대해서 심사위원들은 이미 그들을 세세히 숙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가 평가까지 내리고 있는 처지들이니 어려울 리가 없었던 것이다. 설왕설래 끝에 두 사람의 후보로 압축되었다. 한 분은 판소리 실기자였고, 한 분은 이론 분야의 학자였다. 두 분에 대한 토론 끝에, 이번에는 이론 분야에 비중을 두기로 했다. 이론이 받쳐 주지 못하는 실기는 사상누각이 되기 십상인데, 그간 이론 분야 수상자는 고 이혜구 박사와 몇 해 전 이보형 선생 정도로 너무 소외되었다는 사실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론 분야의 수상자라면 당연히 송방송 교수일 것이라는 짐작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분의 공적은 탁월하다. 우선 방대한 저술량은 웬만한 학자들의 기를 꺾고 주눅들게 하기 십상이다. 종류도 다양하지만, 출간이 됐다 하면 보통 700~800쪽이거나1천여 쪽 이상이다. 기실 오늘의 수상자가 학문계의 사표로 칭송받아 마땅한 더 깊은 속뜻은, 송 교수의 거창한 저술량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이관지 오로지 한 우물만 파며 정진하는 학자적인 자세와 식지 않는 학구열에 있다고 하겠다. 형설지공螢雪之功으로 뜻을 이루던 농본사회도 아니고 얽히고설키며 복잡하게 살아가는 현대 생활 속에서, 이처럼 초지일관 학문에만 침잠하여 큰 성취를 이루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송방송 교수는 그 같은 길을 의연히 걸어온 보기 드문 호학好學이다. 바로 이 같은 그의 삶의 족적은 학계 동료나 후학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크게 상찬賞讚받아 마땅한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국악계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전통문화계의 튼실한 토대를 마련해 주고 있는 최고권위의 방일영국악상이 때마침 송 교수를 천거하여 자랑스런 영예의 월계관을 씌워 드리게 되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
[도서 소개] 한악계의 별들 (저자:한명희)이 책은 가곡 '비목'의 작시자로 널리 알려진 한명희 선생이 인연의 옷깃이 스쳐간 보석 같은 인연들의 이야기를 역사라는 시간의 대리석에 새겨놓은 것이다. 작가가 유려한 문체로 새겨놓은 주인공들은 우리 한악(국악)계의 터를 다듬고 보듬어 온 명인 명창들과 한악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분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된 아리랑과 한국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흥, 멋, 운치)에 대한 해박한 고찰은 한국의 전통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길라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나와 TBC(동양방송) PD 시절부터 국악에 남다른 애정과 사명감을 갖고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우리 국악계를 이끌어 온 분들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어 온 저자 또한 우리 음악을 계승 발전시켜 온 산증인이다. 대학교수와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내면서 《하늘의 소리 민중의 소리》 《우리가락 우리문화》 《한국음악, 한국인의 마음》 《하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학 떠난 빈터에는》 등의 저서는 우리 음악계의 소중한 문헌들이다. 차례 004서문 인연 한 자락 1부010가야고 병창으로 그린 비천상 _ 강정숙 명창012사물놀이로 세계를 제패한 선구자 _ 김덕수 명인016반듯한 기개 꼿꼿한 자존심 _ 김소희 명창022회심곡의 프리마돈나 _ 김영임 명창026월하의 음악 세계가 그립다 _ 김월하 가객028천진무구한 가섭의 염화미소 _ 김천흥 선생034둥둥 북을 울리면 신명이 솟는다 _ 김청만 명인036경기민요의 외연을 넓혀 가는 열정 _ 김혜란 명창038경기민요의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주인공 _ 묵계월 명창041국악교육에 헌신한 선견지명 _ 박귀희 명창044끈기와 집념의 화신 _ 박동진 명창048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내는 능력과 수완 _ 박범훈 교수053늦가을 햇살녘의 잔상 _ 박병천 명인, 김영태 시인059청초한 유덕遺德은 한악계의 등불 _ 성경린 선생061학문의 바탕 체상體常을 튼실히 한 학자 _ 송방송 교수063소리꾼의 판소리 사설 정립 _ 송순섭 명창065장인 정신의 사표가 될 판소리 여왕 _ 안숙선 명창076서도지방의 맛과 멋을 이어 준 고마운 은인 _ 오복녀 명창078동초제 판소리 정립에 기여한 공적 _ 오정숙 명창081소쇄원 광풍각의 죽림풍류 _ 원장현 명인085실사구시의 학문을 궁행한 성실한 학자 _ 이보형 선생088고소한 해학이 일품인 경중예인鏡中藝人 _ 이상규 교수090대금산조의 달인 _ 이생강 달인093노래로 그려 낸 한 시대의 풍속사 _ 이은주 명창096가야고 음악의 경중미인 _ 이재숙 교수099소중한 문화지킴이 한국정가단 _ 이준아 가객101노래와 인품이 교직된 경기민요의 대가 _ 이춘희 명창103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음악학의 태두 _ 이혜구 박사107심금을 퉁겨서 노래하는 국민가객 _ 장사익 가걸歌傑110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소리꾼 _ 정광수 명창113피리로 세상을 보듬어 온 외곬 인생 _ 정재국 명인 116영년퇴은이 유발하는 무정세월 _ 조운조 교수119놀이마당문화의 파수꾼 _ 지운하 명인122한국전통음악연구회의 창단 _ 최경만 명인125정악 가야고의 법통을 잇는 금객琴客 _ 최충웅 명인130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작곡가 _ 황병기 교수133내 삶의 인드라망을 수놓은 한악계 별들 _ 김연수, 이창배 외 2부144전통음악을 사랑하는 고마운 기업인 _ 초해 윤영달 선생148초야에 묻힌 국악계의 보옥 _ 서암 권승관 선생153어느 인연이 그린 삶의 무늬 _ 백석의 연인 자야 여사158기인처럼 살다 간 풍류객 _ 연정 임윤수 선생161정녕 가시나이까 _ 화정 김병관 선생165유어예의 귀명창 _ 호암 이병철 선생175한악계의 은인 _ 조선일보 방일영국악상179문화가 된 노래 아리랑185한국 전통예술을 이해하는 키워드
-
한악계 별들 16: 천진무구한 가섭의 염화미소, 김천흥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지난 한 세기 우리 현대사는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격동의 세월이었다. 굵직한 사건만 돌아봐도, 한일합병과 3·1독립운동, 해방과 정부수립, 6·25전란과 남북분단, 4·19혁명과 5·16군사정권, 광주민주화운동과 88서울올림픽 등 그야말로 숨가쁘게 휘몰아쳐 간 격랑의 시대였다. 사회 풍조나 가치관 역시 상전벽해로 환골탈태돼 갔다. 전통적인 농본사회가 급격한 산업사회로 바뀌어 가고, 서정적인 농촌문화는 삭막한 도회적 일상성으로 환치됐으며, 인륜에 바탕을 둔 유교적 가치관은 자본주의적 물질만능의 풍토로 뒤바뀌어 갔다. 이 같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시대인들은 합당한 대안 없이 표류하며 삶에 대한 힘겨운 갈등과 회의에 빠지기 일쑤였으며, 물질적 풍요와 반비례하는 행복지수를 힘겹게 떠메고 살아야 했다. 바로 이 같은 시대 배경이 심소心韶 김천흥金千興 선생 무악예술舞樂藝術과 인생 역정의 무대이자 토양이다. 결코 태평연월의 호시절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뚜렷한 가치관을 공유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고뇌하고 체념하는 시절이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심소 선생은 소극적으로 ‘사의 찬미’ 같은 엘레지나 부르고 있지 않았다. 해금으로 무용으로, 아니 생불生佛 같은 자애로운 미소로 시대의 병통을 위무하며 구원해 왔다. 같은 시대를 동행한 많은 민초들이 심소의 청아한 가락에 시름을 잊었고, 단아하고 정갈한 심소의 춤사위에 너나없이 동고동락의 희열을 나눴으며, 세사의 달관으로 빚어진 심소의 온유한 미소에는 강퍅剛愎한 세상도 금세 생기를 띠며 봄볕처럼 화사하게 밝아지곤 했다. 시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고[詩言志], 노래는 말로 표현한 생각을 길게 읊는 것[歌永言]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나 정서를 언어나 노래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같은 한계상황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바로 수지무지 족지도지手之舞之 足之蹈之의 몸짓이다. 어설픈 췌언贅言을 버리고 무궁한 침묵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무용의 세계, 곧 침묵의 세계는 상호 소통의 궁극적 묘책이자 대도大道이며 지고한 예술의 경지다.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경우처럼, 백 마디 설명이 필요 없다. 눈빛 하나 몸짓 한 동작으로도 만물을 수렴하며 천하를 설파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사 돌이켜보니, 심소 선생의 해금은 음악이 아니었고 심소 선생의 춘앵전은 무용이 아니었다. 음악이되 음악이 아니고 무용이되 무용이 아닌 그 너머의 세계, 곧 심소의 인생이며 우주관이자 철학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달관의 체로 걸러지고 정제되어 순수무구한 동심의 세계로 응축된 화룡점정의 원형질이 곧 심소 선생의 미소 세계다. 분명 심소의 미소는 심소 예술의 이데아이자 메타포가 아닐 수 없다. 가섭迦葉 같은 지혜로운 후학들이 있어, 정재무악의 진수인 심소 미소의 정체와 미학 세계를 온전히 풀어내고 널리 펼쳐갈 수 있으면 우리네 삶은 한층 풍성한 살맛으로 싱그러워질 것이다. ‘손만 들어도 흥이다. 발만 옮겨도 멋이다.’ 심소 선생은 그렇게 무애無碍의 춤으로 풍진세상을 어루만져 주셨다. ‘눈빛만 닿아도 자애롭다. 표정만 보아도 화평하다.’ 심소 선생은 그렇게 천진무구한 자비심으로 곤고한 중생을 보듬어 주셨다. 이제 심소 선생은 이승의 소풍을 마치고 아득한 피안으로 떠나셨다. 하지만 심소의 사뿐한 춤사위와 동심의 미소는 파란 창공의 흰구름밭에 보허步虛의 춤으로 새겨져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다. 은진 미륵불 같은 자애로운 소안笑顔 세월의 속도는 사람 따라 상대적인 게 맞는 것 같다. 인생 고래희라던 기로耆老의 구간을 넘어서니 젊은 날의 속도감보다도 더 빨리 황혼녘으로 가속이 붙는 걸 봐도 그렇고, 더구나 심소 김천흥 선생이 세상을 하직하신 지가 벌써 5년이 흘렀다는 사실 앞에 서고 보니 정녕 늙은 세대가 감응하는 세월은 백마과극白馬過隙처럼 훨씬 더 빠른 것만 같다. 심소 선생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으레 연상하는 선명한 심상心象이 있다. 바로 절대 자유인으로 서라벌 거리를 기인처럼 누비며 살다간 신라의 고승 원효와 그의 무애무無碍舞가 곧 그것이다. 신라의 원효가 종교적 해탈로 무애무를 추었다면, 20세기 한국의 심소는 영락없이 예술적 달관으로 절대 자유의 경지인 무애의 정재무를 추었다고 하겠다. 그만큼 그의 춤은 물 흐르듯, 춤이되 춤사위를 뛰어넘는 무위자연의 예술적 진경眞景이 펼쳐지고 있었다. 심소의 춤에 인위人爲가 없듯이 심소의 언행이나 섭세涉世 역시 상선약수上善若水같은 순리와 지혜와 노숙老熟이 자연스레 배어나고 있었다. 한마디로 예술의 궁극적 이상이랄 지예至藝의 경지에서 노니는 유어예遊於藝의 세계가 곧 심소의 생애요 삶이며, ‘심소무心韶舞’의 본질이자 미학이라고 하겠다. 내가 국립국악원장으로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원로 사범으로 계시던 심소 선생이 원장방을 찾아오셨다. 아마도 국악원 뜰에 있는 국악계 명인들의 동상을 옥내로 옮겨서 안치하면 좋겠다는 제의를 하신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당시 상황으로는 어렵다고 말씀드렸다. 그때 심소 선생은 섭섭한 표정은 커녕 오히려 활달하게 웃으시며 내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선선하고도 자상한 어투로 위무의 여운을 남기며 방을 나가셨다. 짧은 독대에서 스친 소회이지만, 기실 아무나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천부적인 낙천성에 호쾌한 호연지기와 세상살이의 속 깊은 달통을 거치지 않고는 흉내 낼 수 없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화통한 경지임을 그때 강렬하게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심소 선생은 평생 어린이셨다. 품성도 용모도 마치 동화 속의 선동仙童처럼 천진무구한 동심의 어린이셨다. 기예와 명성이 한 시대를 풍미했어도, 여느 소인들처럼 쓸데없는 허세나 거드름은 아예 발붙일 틈새가 없었다. 천성이 요산요수樂山樂水하며 세속의 속박을 초탈했으니 세상 공명인들 연연할 리 만무하셨다. 그러니 그분의 행적은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을 수밖에 없었고, 말년의 주름진 노안에서처럼 항상 자애로운 미소와 화평한 용색이 평생 떠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한때 우리는 심소 선생이 계셔서 따뜻했었다. 행복했었다. 5주기를 맞아 후학들이 선생을 더욱 그리워하는 속정도 이와 멀지 않은 연유에서일게다. 세상살이 살맛나게 해 주시던 심소 선생의 인자한 용안을 떠올리며, 선생의 방일영국악상 수상을 축하했던 졸작 시구의 일부를 다시 한번 음미하며 추모의 절절함을 공유해 본다. 늦가을 황톳빛 낙엽따라 툇마루 봉당에 내린 햇살보다 따스하다 그 표정 향교 마을 기와지붕 끝 창공에 헤엄치는 물고기 풍경보다 청징淸澄하다 그 심성 은진미륵불의 귓밥보다도 석굴암 보살님의 눈빛보다도 인자하구나 다정하구나, 그 웃음이 (중략) 방일영국악대상 동짓달 열여드레 심소心韶 선생 다시 한번 눈들어 웃으신다, 가락을 고르신다 춤을 추신다 구름 휘장 사이로 햇님 방실 웃으시듯 ‘내가 무슨 상을 받아, 더더구나 큰 상을’ 티없는 파안대소 함박 같은 너털웃음에 너와 내가 행복하구나 세상 살맛 솟는구나 인생살이 더도 덜도 말고 심소 선생 웃음만 같아여라 웃음만 닮아지여라.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
제27회 방일영 국악상, 판소리 명인 송순섭 수상11월 19일, 송순섭 명인(84세,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 보유자)이 방일영문화재단(이사장 조연흥)이 수여하는 제27회 방일영국악상을 수상했다. 서울 코리아나 호텔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수상자는 상패와 상금 7000만원을 수여받았다. 송순섭 명인은 1936년 전남 고흥 출생으로 21세에 소리 공부를 시작하여 스승 박봉술에게서 적벽가를 사사하였다. 1994년에는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장원을 수상했으며, 1970년대 ‘국악 불모지’ 부산에서 판소리 창작극 10여 편을 기획하여 흥행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00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화관문화훈장, KBS국악대상, 동리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후 부산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을 거쳐 전남 순천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수상자는 "이 상을 동편제를 제대로 만들어주신 박봉술 스승의 영전에 바친다. 동편제를 앞으로 지켜가라는 격려로 받아들여 서슬 깊은 소리로 보답하겠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
[부고] ‘경기민요 인간문화재 ’ 이은주 명인 별세2020년 11월 2일 경기민요 인간문화재 이은주(본명 이윤란, 향년 98세) 명창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고(故) 안비취(1926~1997), 묵계월(1921~2014) 명인명창과 함께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여성 3인방'으로 불리며 경기민요 전승과 보급 및 발전에 평생을 헌신해왔다. 1975년 이은주경기창연구원을 개원하고 후진 양성에도 지속적인 열정을 쏱았다. 이은주 명인은 1922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1936년 원경태 선생에게 사사하였다. 1939년 KBS의 전신인 경성방송국 음악 프로그램으로 데뷔하여 이름을 알렸다. 같은 해 인천 ‘흥명극장 팔도명창대회’에서 ‘수심가’를 부르며 1위를 차지했다. 한국전쟁 때, 일제강점기때 불리다 잊혀진 구전민요 '태평가'를 복원해 전국적 명성을 얻었으며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1948년 ‘고려레코드’의 민요음반을 시작으로 유성기 음반 80여 장, LP 300여 장 등을 발표했으며 1999년 팔순을 앞둔 나이로 경기 12잡가 전곡을 녹음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93년 옥관문화훈장, 2006년 방일영국악상 등을 받았으며 2010년 한민족문화예술대상 민요부문에서 수상했다. 빈소는 한양대병원 장례식장 지하 6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1월 5일 오전 6시 40분이다.
-
‘방일영국악상’ 제27회 수상자로 소리꾼 송순섭방일영문화재단(이사장 조연흥)이 수여하는 ‘방일영국악상’ 제27회 수상자로 소리꾼 송순섭(84·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 보유자)씨가 선정됐다. 전남 고흥 출신인 송씨는 다른 명창들에 비해 다소 늦은 나이인 21세에 소리 공부를 시작했으나 송광록-송우룡-송만갑을 거쳐 박봉술 명창으로 이어진 정통 동편제(東便制) 소리를 올곧게 전승한 대가다. 1994년 58세에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 장원을 했고, 1970년대 ‘국악 불모지’ 부산에서 판소리 창작극 10여편을 기획해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후 서울대와 한예종을 거쳐 전남 순천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회는 "폭포수 내리치듯 장쾌한 소리로 무대를 활기차게 이끌어 온 송순섭 명창은 여든이 가까운 나이까지 ‘적벽가’를 완창하며 예술혼을 불사른 ‘영원한 현역’”이라며 "남성 특유의 호방함과 툭툭 던지는 듯한 시원함으로 판소리 다섯 바탕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적벽가’를 완벽히 소화, 특유의 힘 있는 소리를 잘 표현해준 예인”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1994년 제정된 방일영국악상은 평생 국악 발전에 기여해온 공로를 바탕으로 하되 현재에도 활발하게 공연 활동을 펼치는 국악인에게 수여된다. 수상자는 상패와 상금 7000만원을 받는다. 시상식은 11월 19일 오후 5시 서울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다.
-
방일영국악상방일영문화재단에서 1994년 국악의 해를 기념하여 전 조선일보 고문의 이름을 빌려 제정한 공로상. 재단의 설립이념은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를 되살려 다가올 선진 사회를 가꾸고 전통문화를 보전, 발전시키는 일에 중요한 사명의식과 국악의 올바른 전승과 보급에 앞장서 전통문화 창달에 기여한 국악인들의 업적을 널리 기리려는 데 목적을 둠. 1994년부터 2019년까지 21회에 걸쳐 21명의 수상자 배출.
-
제12회 방일영 국악상 /대금산조 이생강 명인무제 문서 제12회 방일영 국악상 / 대금산조 이생강 명인 국악발전 에 큰 공적을 남기신 분들에게 드리는 방일영국악상제12회 수상자로 대금산조 이생강 명인으로 결정됐다. 이생강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돼 있는 대금 산조(散調)뿐 아니라, 피리 산조와 퉁소 산조, 단소 산조까지 이생강류로 새롭게 빚어냈다. 선생의 대금 산조는 밝고 화사한 빛깔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모두 담아낸다. 선생은 “많은 관악기를 다루지만 대금만큼은 머리맡에 두고, 곡상이 떠오르면 즉시 대금으로 음을 찾곤 한다”고 말했다.
-
국악계 원로 만당 (晩堂) 이혜구 박사국악계 원로 만당(晩堂) 이혜구 박사의 100세를 축하하는 모임이 지난달 9일 오후 5시 서울 서초구 서초동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렸다. 휠체어에 탄 채 무대에 오른 이 박사는 자신의 백수를 축하하는 국악인들에게 “먼저 간 동지와 후학들의 명복을 기원한다”며 인사를 전하면서 “백수(白壽)논문집은 이 몸이 100세를 산 기쁨을 느끼게 합니다. 그간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에 묻혀 100세를 살아왔습니다.” 이날 모임에서 후학들은 이 박사에게 ‘만당 이혜구 박사 백수 송축논문집’(민속원)을 봉정했다. 1060쪽에 이르는 이 논문집에는 한국과 미국, 일본, 영국, 베트남 등지에서 연구하고 있는 30∼80대 후학들의 논문 45편이 실렸다. 서예가 원중식 씨는 논문집 제호를, 이수덕 씨는 기념휘호를 각각 썼고, 화가 오승우 씨는 십장생도, 한명희 전 국립국악원장은 송축시, 예술원 회원인 김종길 씨는 송축사, 작곡가 강석희 씨는 작품 ‘Myth’를 각각 헌정했다. 또한 서울대 국악과 제자들이 궁중 정재(呈才)인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을 연주했다. 현재 ‘한국국악사’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이 박사는 “내 생전에 환갑(還甲)논문집, 구순(九旬)논문집, 백수논문집 등 3권을 봉정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라며 “해를 거듭할수록 논문집에 실린 논문의 편수가 늘어나는데 이것은 한국음악활동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기쁜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건강비결에 대해 “특별한 것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 전통가곡인 우조 이수대엽(羽調 二數大葉) 한 토막을 부르고, 차 한 잔하면서 깊은 심호흡을 한다. 굳이 꼽는다면 그 정도다”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평소 ‘걷기’로 건강을 지켰다. 그러나 요즘은 그마저 여의치 못하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운동은 계속하고 있다. 꾸준히 휠체어를 움직이다보면 저절로 ‘팔운동’효과를 본다고 했다. 이 박사는 한국 국악의 살아있는 ‘현대사’다. 서울에서 태어난 이 박사는 경성제국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경성방송국에 프로듀서로 입사해 국악 프로그램 등을 담당했으며 해방 직후에는 방송국장을 역임했다. 이때 국악과 인연을 맺어 전통음악을 연구하기 시작한 이 박사는 1948년 ‘국악연구발표회’를 시작해 현재의 사단법인 한국국악학회의 초석을 놓았다. 1954년에는 한국국악학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 박사는 서울대 음대 학장을 거쳐 1974년 정년퇴임한 뒤에도 1990년대 중반까지 서울대 명예교수, 한양대 및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1909년 서울 출생 ▲한국국악학회 초대회장(54년) ▲서울대 음대 학장(70년) ▲국제민속음악협의회 이사(79년) ▲영국 더럼대 명예음악학 박사(82년) ▲제1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91년) ▲방일영국악상(95년) ▲문화관광부 금관문화훈장(2004년)
-
석암(石菴) 정경태(鄭坰兌)선생 영면 (永眠) 1주기 추모제'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歌詞) 예능보유자인 석암(石菴) 정경태(鄭坰兌)선생의 1주기 추모' 일시 : 2005년 1월 17일 오전 10시 장소 : 타워호텔 젤코바 홀 석암(石菴) 정경태(鄭坰兌)선생은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부안농고, 전주고 교사, 우석대 교사를 지냈다. 한시와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아악보'등 책을 내고 시문집도 다섯권 발표하였으며, 대한시우회와 대한정악회의 창립, 회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보관 문화훈장 (97년), 방일영국악상(2001년)을 수상, 조선 선비의 기개와 풍류가 흐르는 '백구사(白鷗詞)'등 12가사를 잇고, 시조(詩調)를 생활 노래로 보급해 국악의 생활화에 기여했다. 또한, 시조의 악보인 선율보를 만들고, 지방마다 서로 다른 시조가락과 창법을 그이 아호를 딴 '석암제'로 통일했다.
-
제10회 방일영 국악대상 " 황병기 교수"조선일보사가 국악계 발전을 위해 제정한 방일영국악상(상금5천만원)의 제10회 수상자로 황병기 선생이 선정되었다. 수상식은 오는 11월 21일(금) 오후 5시 조선일보사 7층 강당에서 갖는다. 황병기 선생은 70~80년대 한국 가야금 창작곡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과 근, 현대 한국음악사에 끼친 공로로 선정 되었다.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대한민국, “문화정책 없는가?”
- 2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3)<br>강원도아리랑
- 3제1회 '김법국국악상' 후보 3인, 심사
- 4‘2024 광무대 전통상설공연’
- 5국립남도국악원, 불교 의례의 극치 '영산재', 특별공연
- 6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5)<br>한국 최초 '도깨비 학회', 아·태 도깨비 초대하다
- 7국립민속국악원, '제6회 2024 판놀음 별별창극'
- 8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 대상에 이소영씨
- 9서울문화재단,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서울스테이지 2024' 5월 공연
- 10제3회 대구풍물큰잔치 ,19일 디아크문화관광장